아들 이야기

서른둘 박진솔 "삶이 잠자던 내 승부혼에 불을 지폈다"

괴목 2018. 4. 3. 19:38

서른둘 박진솔 "삶이 잠자던 내 승부혼에 불을 지폈다"

입력 : 2018.04.03 03:01

[화요바둑]

'에이스 킬러' 떠오른 박진솔 8단
황금 시절 100위권 밖 헤매다 30세 넘겨 최고 순위 연속 경신
"마흔 살까지 지금 위치 지킬 것"

철저한 약육강식의 바둑 세계엔 두 가지 불문율이 있다. 약자는 강자를 좀체 못 이긴다는 것, 그리고 어떤 강자도 20대 중반부터는 내리막길에 접어든다는 것. 이 '철칙'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승부사가 있다. 만 32세의 박진솔 8단이다.

박진솔은 지난달 열린 GS배 16강전서 천하무적 박정환(25)을 눕혔다. 12일 그와 4강을 다투게 된 김지석(29)은 "박 8단에게 당한 기억이 많아 단단히 준비하겠다"며 긴장한 표정이다. 둘 간 통산 전적은 2승 2패. 국내 10위권 기사 중 이동훈에겐 3승 1패로 앞서 있고, 박영훈과도 2승 3패로 박빙이다. 작년 바둑리그에선 원성진 허영호 등 강호들을 이기며 12승 6패(다승 8위)를 기록했다. 2016년에도 최철한 등 적장을 잇달아 꺾어 '에이스 킬러'란 별명이 붙었다.

어린 시절부터 초속기로 유명했던 박진솔. 그는 오는 12일 열릴 김지석과의 GS배 8강전에 대해 “내 승산은 20% 정도”라면서도 전의를 불태우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초속기로 유명했던 박진솔. 그는 오는 12일 열릴 김지석과의 GS배 8강전에 대해 “내 승산은 20% 정도”라면서도 전의를 불태우고 있다. /이홍렬 기자
하지만 그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5년이 채 안 된다. 2002년 프로 데뷔 후 약 10년간 한국 랭킹 100위권 밖에서 맴돌았다. 그러던 박진솔이 2014년 4월 64위, 2015년 53위, 2016년 38위에서 지난해 29위까지 치솟더니 올해 3월엔 19위로 도약했다. 곧 발표할 4월 랭킹에선 또 한번 최고 순위를 끌어올릴 전망이다. 바둑계에 전례 없던 '나이 역주행'이다.

출발은 누구 못지않게 화려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연구생 등록 후 단숨에 10조에서 2조로 쳐 올라갔다. 보통 4~5년 걸리는 코스를 1년 만에 끝내자 "천재가 나왔다"며 떠들썩했다. 입단 대회에선 훗날 세계 스타로 군림한 세 살 아래 강동윤을 밀어내고 '장원급제'했다.

"막상 프로에 온 뒤엔 이겨야 한다는 생각이 없었어요. 바둑 공부와는 담을 쌓았죠." 대전에 거주하는 부모님과 떨어져 자취하다 보니 아무도 관리해주지 않았다. 하루 10시간 넘게 게임에 빠져 지냈다. 경쟁자들이 너무 강해 보여 기권하는 일도 늘었다. 이런 생활이 제대(2008년) 직후까지 계속됐다.

그러나 20대 중반 어느 날, 살아남으려면 이겨야 한다는 걸 불현듯 깨달았다. 더 이상 패했다간 굶을 판이었다. 프로 기보를 검색해 보기 시작했다. 도장에서 후배들을 가르치자 승부 감각도 살아났다. 2011년 처음 4개 대회 본선에 오르고 '락스타리그'에서 2번 연속 다승왕을 했다. 김영삼 감독이 그를 정규 리그 정관장 5지명으로 불렀다. 박진솔이 '올드 스타'로 거듭난 전환 점이었다.

그는 "요즘은 어떤 상대도 다 싸워볼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면서 "승부에 전력할 동기를 부여해준 것은 생활이었으니 나는 '생계형 기사'인 셈"이라고 했다. "나이 먹는 게 꼭 마이너스 같지는 않아요. 요령도 생기고…. 한 마흔 살까지만 지금 위치를 지켜가는 게 목표예요." 서른둘 박진솔이 바둑계의 수백 년 묵은 정설을 송두리째 갈아엎어 가고 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4/03/201804030014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