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이야기

차디찬 승부세계, 커피향으로 물들인 10년카페유전(有田) 10년, 이세돌이 만델린 커피드립 연속 3잔 들이켜던 그곳

괴목 2022. 10. 23. 10:56
▲ 김지명 카페유전 대표, 바둑MC



종로 관철동의 한국기원이 90년대 중반 상왕십리로 옮기고도 10년이 훨씬 넘게 지난 2012년 9월 2일, 한국기원 1층 바둑TV에서 방송을 준비하던 김지명 MC는 한 방송코디가 제작진을 위해 20분 넘게 걸려 구해온 커피를 받아 한모금 마시고 바로 뱉고 말았다.

“세상에 이렇게 맛없는 커피가 있다니”

그날 김MC는 심하게 맛없는 커피에 몹시 화가 나 적당한 장소만 있으면 직접 커피를 볶고 내려야겠다고 결심했다. 당시 한국기원을 포함한 상왕십리역 블록엔 커피숍이 3개 있었지만 김MC의 입맛에 맞는 곳은 없었다. 김MC는 다음날 마침 한국기원과 같은 길에 위치한 빈 식당(닭칼국수집)이 임대로 나온 것을 확인하고 바로 계약하고 만다. 카페 이름은 영화나 음악에서 따오려 했으나, 바둑TV PD출신 바둑광 하영훈 부장의 조언을 받아들여 '유전(有田)'으로 정하게 됐다. 有田의 상징인 서체는 서예가 고(故) 김창동 선생에게 받았다.

이렇게 2012년 10월 오픈한 카페유전이 2022년 10월 10주년을 맞게 됐다. 여전히 40대초의 미모를 자랑하는 김지명(본인피셜 나이 미상)사장을 서울 홍익동에 자리한 카페유전서 만나 지난 10년의 감상을 들을 기회가 생겼다.

○● 이세돌, 대국전 들러 커피 3잔을 마시던 손님

- 10년이면 많은 손님이 기억날 텐데, 특별한 손님을 꼽자면?
“이세돌 9단이다. 이세돌은 대국이 있는 날이면 종종, 그게 예선이든 중요한 대국이든 상관없이 대국 시작 전 유전에 들러 만델린 커피를 주문해 3잔을 내려 연거푸 마시고 자리를 떴다. 급하게 마시면 한잔만 마셔도 손이 떨릴 수 있는데 이세돌은 10~20분 정도에 3잔을 마시니까 꽤 독했을 거다. 이세돌은 대국전 긴장을 고조시키기 위해 그렇게 마신 거 같다. 바로 옆자리 그 의자에 혼자 앉아 커피를.. (들이켰다)”

-그동안 주위 환경도 많이 변한 것 같다. (한국기원 주변의 곱창골목, 철공소 골목등은 모두 없어지고 왕십리 뉴타운과 왕십리 복합역사가 들어섰다. 앞으로도 꾸준히 유전(有錢)하셔야 할텐데 )
“10년 사이, 이 좁은 한국기원 블록에 커피숍만 29개가 생겼다. 하하하”

▲ 이곳이 바로 이세돌 9단이 앉던 자리, 뭐 기회 되시면 한번 방문하여 앉아보시라.


○● 한국기원 관철동 시대의 '유전'을 이어받아
-카페 이름을 유전으로 정했는데, 종로 관철동 시절 한국기원 지하에 있던 유전다방과의 추억이 있는지?
“있다. 70~80년대 한국기원 연구생으로 기록을 맡았었다. 본선대국이 시작되면 유전다방에서 보온병에 담긴 커피와 커피잔 세트를 들고와 대국자들에 따라 주곤 했다. 보온병에 남은 커피는 기록자에게도 따라줬는데 당시 설탕과 프림을 듬뿍(각 세스푼)탄 커피로 커피를 처음 배웠다. 담배가 허용되던 때라 기록자들은 점심때 대국자들의 재떨이를 비우곤 했다. 이곳 상왕십리로 한국기원이 이전하면서 유전다방도 잊혀졌는데 이름을 유전으로 택한 건 잘한 일인 것 같다”

- 카페에서 잘 찾아보면 관철동 시절의 조훈현 9단의 뒷모습이 담긴 유전커피 사진이 소품으로 자리잡고 있다. 커피는 김지명 사장의 인생이 됐다.
“방송을 위해 대기하다 보면 시간이 뜰 때가 많다. 사람들과 기원에 들르기도 하고 당구장을 가기도 하곤 했지만 어떤 때는 이런 게 좀 한심하기도 했다. 그 시간에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커피였다. 요즘은 유튜브로 많은 걸 배울 수 있지만, 그땐 커피를 좀 더 전문적으로 알고 공부하기 위해 일본까지 갔었다. 일본에 역사가 오래된 전문적인 커피숍이 많았기 때문이다.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었지만 좋은 추억이라 후회는 없다”

- 99년 이후 방송인으로서 김지명 MC는 온미디어, CJ, 한국기원으로 주인이 바뀐 바둑TV와 K바둑까지 바둑방송에서 많은 진행을 했다. CJ 시절 한 바둑TV PD는 방송인 김지명에 대해 '바둑방송의 진행자는 시청자를 위한 존재다. 당연히 바둑실력은 프로해설자가 뛰어나지만, MC가 프로기사에게 지나치게 굽신거리거나 위축되는 진행은 대개의 시청자에게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다. 김지명 MC는 자연스러운 진행 능력이 진행자들에서 단연 돋보였다'라고 평가한 바도 있었다.
“아, 공감하는 부분이 있다. 일종의 밸런스인데 고조되는 장면에선 진행자는 그에 맞게 흥분도 하고, 방송 내내 텐션 유지를 해야 한다. 해설자 말에 그냥 하하 호호 맞추고 웃는 걸론 부족하달까. 바둑처럼 남성팬이 많은 격투기나 각종 스포츠, 게임같은 방송을 봐도 그런 역할을 하는 진행자는 필수적이고 중요하다.
앞으로 제가 방송을 열심히 할 수 있는 기간은 2~3년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그 이후는 어려울 거 같다. 요즘은 방송일정이 잡히면 그에 맞춰 미리 컨디션 조절을 할 정도로 집중한다”

- 10년의 소회가 남다를 것 같다.
“행복했지, 많은 사람을 만나고 행복했다. 말로 표현하기기 힘들다..(글썽글썽) 카페유전과 함께 전성기를 보낸 행복한 10년이었고, 중간에는 방송도 없고 하는 일이 없어 많이 어려울때, 내가 몹시 어려울 때조차도 이곳은 위안이 됐다. 내가 (나이보다) 젊게 살 수 있었다면 카페유전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 경고 : 사계절 바둑여신 상습출몰지역

- 이곳이 '바둑여신 상습출몰지역'이라고 들었는데? '바둑여신 양성소'라고도 하고?
“읭? 여신? 아하하. 바둑방송에서 진행을 많이 맡은 김규리, 이유민 MC가 여기서 오래 일을 했다. 김규리는 5년간 같이 일했다. 둘 말고도 그보다 짧게 일한 바둑MC들도 많다. 우연찮게 들렀다가 카페에서 일하게 된 일본 유학생들도 있었고 그중 일부는 한국서 결혼까지 했다. 그리고 원년멤버로 일했던 분들이 종종 찾아주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방송으로 무척 바쁘지만 바둑계 여신들이 잊지 않고 종종 찾아준다”

그러나 때맞춰 찾아온 이곳 유전에 언제나 여신이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인생은 매우 다양한 우연의 연속이라 콧수염과 대머리로 가득찬 카페를 마주할 수도 있고, 때론 아주 전세낸 거 마냥 카페에 홀로 앉아 여유를 즐길 수도 있음이다. 이세돌이 급하게 커피 3잔을 채우던 그 자리에서 말이다.

▲ 10주년을 맞아 방문한 카페유전의 원년멤버와 함께

 

▲ 오른쪽 구석의 사진, 관철동 한국기원시절의 유전커피로 들어서는 조훈현 9단의 뒷모습이 보인다. 고(故) 이광구 바둑칼럼니스트의 사진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 카페유전 전경, [카페유전 인스타그램]

 

▲ 양신과 함께, 왼쪽이 신민준 9단, 오른쪽이 신진서 9단, 2014년 [카페유전 인스타그램]

 

▲ 방송대기중, 박지연 프로와 함께

 

▲ 지난 10년, 큰 대회나 행사가 있을 때마다 카페유전은 바둑계의 사랑방 역할을 해왔다.

 

▲ 왼쪽 허서현 프로, 오른쪽 최정 프로, 제일 신난 김지명 대표

 

▲ 그때 그 시절, 유전커피숍 간판이 오른쪽에 보인다. 유전(有田)은 일본말로 '아리타'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종로부근에 유전,송전 등의 가게가 있었고, 관철동에 한국기원이 신축되자 그 이름을 따서 유전다방이 시작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상왕십리의 카페유전은 그 시절의 추억을 유전(遺傳)하고 있는 셈이다.